설악.지리산 (ⅰ)

폭설속의 대청봉 등반

킬문 2006. 7. 15. 10:46
2001년 2월 15일 (목요일) 

◆ 산행일정
상봉터미널(06:10)
오색시설지구(09:05)
오색매표소(09:19)
설악폭포(10:29)
대청봉(11:56)
중청대피소
대청봉(12:32)
오색매표소(15:03)
오색시설지구(15:19) 

◆ 산행시간
약 5시간 44분 

◆ 후기
상봉터미널에서 6시10분발 속초행 첫버스에 오르니 손님은 단 세명뿐이라 맨앞의 널찍한 자리에 앉는다.
이 버스는 수도권에서 가장 일찍 설악산으로 갈 수 있어 당일산행을 하려면 이 버스를 꼭 타야 한다.
어제 저녁 뉴스로 전국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것은 알고있지만 아침 날씨는 약간 흐려있기는 해도 많은 눈이 것같지는 않다.

늘상 멈추는 성산휴게소에서 더운 우동으로 아침을 먹고 나오니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한다.
인제에 오니 눈이 점차 쌓이기 시작하지만 설마 많이야 오겠나 하는 생각뿐 별로 불안감은 들지않는다.
원통에서 두분이 내리고 나 혼자만 태운 버스는 한계령을 넘어 오색으로 내려 가는데 벌써 이곳에는 도로에 눈이 제법 쌓여있다.
오색매표소 앞에서 잠깐만 내려 달라고 기사에게 사정을 해도 법규에 어긋난다며 들은 척도 않한다.
혼자 밖에 없으니 슬며시 세워줘도 되련만 기어이 매표소를 지나쳐 시설지구 앞에 차를 세우는 늙은 기사가 얄미워 눈을 한번 째리고 내린다.(09:05)
휴게소에서 담배라도 한갑 찔러 넣어줄걸 하는 후회감이 생기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이다.
눈이 소북히 많이 쌓인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눈발이 점점 세지고 찬바람에 살이 에인다.
매표소에 도착하니 7-8명의 젋은이들이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며 바쁘게 산행을 준비하고 있다.(09:19)

스패츠만 하고 매표소에서 조금 올라가면 눈은 발목까지 차고 가파른 돌길은 얼음이 얼어 반질반질하다.
나무를 잡아가며 급경사 오르막을 올라 큰 배낭을 멘 젋은이를 추월하고 계속 오르면 나이 드신 몇분이 내려 오면서 눈이 너무 많고 미끄러워서 설악폭포에서 되돌아 온다고한다.
조금 더 오르니 길이 너무나 미끄러워 별 수 없이 아이젠을 착용한다.
눈은 점점 많이 쌓여 사방은 온통 은백색이고 길은 눈위로 희미한 흔적만 보일 뿐이다.
계속 올라가다 앞서 가던 두부부를 추월하니 이제는 발자국도 보이지 없고 사방에 눈 내리는 소리뿐 설악은 깊은 정적에 묻혀있다.
정강이까지 차는 눈을 뚫고 계속 오르니 설악폭포에 닿고 눈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가 낭낭하게 들린다.(10:29)

폭포를 지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온통 얼음이 얼어 있고 미끄러워서 조심해서 올라간다.
돌길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 가는데 대학생 셋이서 내려오며 이렇게 험한 길은 처음이라며 매표소 가는 길을 묻고 부리나케 내려간다.
눈이 덮어있어 보이지않는 나무계단을 찿아서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올라가면 싸래기 눈은 스륵 스륵 끊임없이 내리고 강풍이 불어와 뺨을 때린다.
눈을 맞아가며 계속 길을 올라서 "대청봉 1km" 이정표를 지나는데 위에서 덩치 좋은 등산객 한명이 내려온다.
이 눈속에 웬 사람인가 하고 "반갑습니다"하고 인사하니 대뜸 내려 가란다.
관리공단 직원증을 보여주며 자기는 올라오는 등산객들을 데리고 내려가는 마지막 사람인데 지금 위에는 폭설과 강풍으로 비상이 걸렸다고한다.
그래도 멀리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내려갈수 는 없고 대청봉만 갔다 오겠다고 부탁 하니 절대로 않된다고 한다.
하지만 경험 많은 산악인인양 계속 떼를 쓰니 대청봉에서 중청으로 내려가지 말고 바로 오색으로 하산해야 한다며 주민등록증을 맡기란다.
다른 길로 내려 갈까 믿을수가 없다고 하면서...
정말 오색으로 내려 간다고 약속하니 그냥 보내 주면서 걱정이 되는 듯 몇번이고 뒤를 돌아 보며 내려간다.

무릎을 덮는 눈길을 뚫고 관목숲을 지나면 길은 아주 희미해져서 신경을 쓰며 올라가야한다.
옛 대청산장터를 지나고 암릉을 오르니 그곳에는 대청봉이 포효를 하고 있었다.(11:56)
하늘은 시커멓게 흐려져 있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하고 눈보라가 금속성의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휘날리고있었다.
거센 바람에 눈은 뜰 수도 없고 뺨은 떨어져 나가는 듯 감각이 없어지며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람 부는 데로 이리저리 내쏠린다.
소백산의 칼바람도 맞아 봤지만 이곳의 광풍은 그 이상이며 잠깐이래도 서있을 수가 없다.
제대로 눈도 못뜨고 철줄을 잡고 엉금엉금 기어서 한참을 내려가니 그제서야 중청산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미끄러운 암릉을 뛰듯이 내려가 산장문을 열고 들어가니 공단직원들이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 왔냐고 깜짝 놀란다.
눈을 털어내고 빵과 우유로 점심을 먹으며 물어보니 천불동쪽으로는 엄청난 폭설이 와서 입산금지이고 오색으로 내려가는 것이 비교적 안전할것 이란다.
도로가 막혀 집에 못 돌아갈까 덜컥 겁이나 서둘러 짐을 꾸려 산장을 나선다.

산장을 나와 다시 폭풍이 부는 대청봉을 오르니 어김없이 거센 눈보라가 몰아친다.
다행히 요기도 하고 더운곳에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느껴지는 추위는 아까보다 덜하다.
윙윙 귓청을 울리는 미친 바람을 맞으며 대청봉에 다시 서니 설악산은 온통 암흑으로 덮혀 있어 한치앞도 보이지 않고 불안한 마음에 내려갈 마음만 더욱 급해진다.(12:32)
정상에서 내려가면 바람은 좀 잦아들지만 싸래기 눈은 쉬임없이 내린다.
조금 더 내려가니 올라왔던 길 흔적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사방은 온통 흰눈으로 뒤덮혀 있다.
백설속의 설악은 상상할수 없도록 아름답지만 길이 없어져버려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운 마음이 든다.
표지기를 보며 조심해서 길을 찿아 내려 가면 눈은 금방 허벅지까지 차 오른다.
계속 내려가는데 길인듯 아닌듯 애매모호해지며 눈은 점점 깊어져 허리까지 묻힌다.
분명히 이길이 맞는데 갸우뚱하며 내려가니 이제는 가슴까지 빠지고 움직이기도 힘들어진다.
이렇게 눈에 많이 빠지면 정상적인 길은 아닐 것이고 이제는 길이 확실한 곳까지 다시 올라 가야 한다.
내려왔던 발자국을 따라서 한동안 올라가니 표지기가 보이고 등로는 그 왼쪽 소나무옆으로 이어져있다.
순간의 실수로 눈속을 내려 갔다 올라오니 체력소모가 많고 지치지만 제길을 찾으려면 확실한 곳까지 빽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느낀 셈이다.
평소에 오색을 오르 내리며 왜 이렇게 표지기들을 많이 붙여 놓았나 짜증을 내곤 했었는데 오늘은 그 하잘것 없던 표지기들이 생명의 버팀목이다.

드문드문 보이는 표지기를 보며 내려가면 눈이 좀 덜 쌓여있어 안심은 되지만 눈은 스륵스륵 하염없이 내려온다.
눈구덩이속을 뛰듯 내려가 설악폭포앞의 급경사 내리막에서 일단 멈춘다.
바닥은 다 얼어 붙어있고 눈이 쌓여서 발밑의 얼음이 보이지 않아 아이젠을 해도 급경사 내리막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
내려서자 마자 미끄러져서 구르고 나뭇가지에 걸려서 간신히 멈춘다.
미끄럽지 않은곳을 골라서 내려오다 또 미끄러지는데 몇바퀴 구르고 일어나보니 아이젠 한쪽은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이제는 공포에 떨며 한쪽 아이젠으로 엉금엄금 기어서 내려가는데 계속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것이 정말로 죽을 맛이다.
진땀을 빼고 내려와 철계단을 건너면 낮은 지대여서 그런지 이곳에는 또눈이 엄청나게 쌓여있다.
표지기를 확인하고 앞에 뻔히 보이는 표지기를 보며 가는데도 눈은 가슴을 덮고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서 눈속에 완전히 파묻히는 것이 아닌가 공포에 질린다.
나무뭉치를 잡아가며 간신히 빠져나와 고개로 올라가면 길이 좀 평탄해져서 안심이 되지만 눈은 끊임없이 내린다.
계속 내려가니 매표소로 가는 가파른 내리막 길이 나오고 이곳에도 길은 완전히 얼어있다.
한쪽 아이젠을 하고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나뭇가지를 잡고 엉금엄금 기어서 내려가 드디어 오색매표소에 도착한다.(15:03)
약속대로 이곳으로 내려 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안을 들여다 보아도 아까 만났던 그 직원은 보이지 않는다.
도로에 나오니 엄청난 눈이 길위에 쌓여있고 다니는 차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색 시설지구 앞의 버스정류장에서 한동안 기다리다 뒤늦게 온 홍천행 버스를 간신히 타고 한계령을 넘으면 뉴스에서는 32년만의 폭설로 전국의 교통망이 마비가 되고 모든 산의 입산이 통제되고있다고 아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