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지리산 (ⅰ)

미완의 설악산 종주 (십이선녀탕-귀청-대청-공룡능선-마등령)

킬문 2006. 7. 19. 17:34
2005년 9월 24일 (토요일)

◈산행경로
상봉터미널(17:50)
남교리(21:37-23:55)
십이선녀탕매표소(24:00)
주능선(04:12)
대승령(04:57)
1408봉(06:56)
귀떼기청봉(09:15)
한계령갈림길(10:10)
끝청봉(11:52)
대청봉(12:38)
희운각대피소(13:52-14:12)
마등령(17:36)
비선대(20:18)
설악동(21:00)
속초시외버스터미널(21:33)
동서울터미널(22:00-01:53)

◈ 도상거리
약 33.6km

◈ 산행시간
약 21시간

◈ 동행인
신광훈

◈ 산행기

전철역에서 상봉터미널까지 오면서 수많은 김밥집이 있는데 터미널안의 식당에서 파는 김밥이 괜찮았다는 생각에 그냥 지나치지만 막상 달랑 하나 남은 김밥이 그리 맘에 들지않는다.
밖으로 나와 김밥집을 찾아보니 옆의 실내경마장에서 돈을 잃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야외 포장마차에 앉아 낮술을 마시며 불콰한 얼굴들로 이야기를 나눈다.
실해 보이지도않는 김밥을 사 넣고 신광훈님과 만나 캔맥주 하나씩 마시고는 대진가는 마지막 버스에 앉아 애써 잠을 청해보지만 그냥 자다깨다 할 뿐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


두루두루 들러 시간될 때까지 기다리는 지겨운 완행버스로 남교리에 도착해 불켜놓은 식당을 찾아 두부찌게에 소주 한잔씩하고 방바닥에 누워 시간을 죽인다.
11시쯤 문닫는 식당에서 쫓겨나 야외의 평상에 누워 눈을 붙히려니 설악의 물소리는 귀청을 울리고 풀벌레들은 벌써 익어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듯 애처롭게 울어댄다.
자정 정각에 십이선녀탕 매표소를 통과하고 낯익은 계곡길을 따라가면 어제의 강북야등에서 과음한 탓인지 몸이 무겁고 컨디션이 난조인 것같아 불안해진다.


비몽사몽 잠에 빠져 걸어가다 바삐 앞서가며 때로는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는 신광훈님을 불러 계곡을 따라 너덜길을 올라가니 장도를 격려하듯 열린 하늘에는 초생달과 수많은 별들이 빛을 발한다.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있는 봉숭아탕과 거대한 물줄기를 공포스럽게 품어내는 두문폭포를 지나고 언제나 재미없게 느껴지는 철난간 바윗길을 몽롱한 상태에서 갈짓자 걸음으로 올라간다.
최근의 잦은 비로 물이 넘쳐나는 계곡을 여기저기 건너다 무심코 젖은 바위에 발을 내딛는 순간 미끄러지며 몸이 한바퀴 돌아 물속에 처박히고 만다.
간신히 몸을 물속에서 빼내 비상랜턴을 켜보니 헤드랜턴은 이미 물에 떠내려갔고, 몸은 물투성이며, 양팔은 까져 피가 흐르고, 바지에 가려있는 두다리는 타박상을 입었는지 날카로운 통증이 온다.


골절되지 않은 것만 해도 큰 다행으로 생각하며 조금 위에서 기다리던 신광훈님과 만나 계곡 상류부를 지나고 바위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어가며 주능선에 오르니 아직 설악은 시커먼 실루엩에 묻혀있고 차지않은 바람만 살랑살랑 불어온다.
멧돼지들이 마구 갈아엎은 황톳길을 따라 대승령(1210.2m)을 지나서 서북능선으로 들어가니 컨디션 좋다는 신광훈님은 휑하니 사라져버리고 홀로 잡목들을 헤치니 대책없는 졸음기가 또 몰려온다.
밧줄이 걸려있는 1289봉을 넘고 암릉들을 오르내리며 지겹게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라가면 날이 밝아오며 흰구름이 넘나드는 가리봉과 주걱봉이 멋지게 보이고 뭉실뭉실 솟아오르는 구름틈으로 설악의 암봉들이 모습을 나타낸다.


암릉을 넘어 시야가 훤히 트이는 1408봉을 오르면 안산에서 이어지는 서북릉이 한눈에 들어오고 아직 높게 솟아있는 귀떼기청봉은 오늘따라 까마득하게 보여서 갈길이 걱정이 된다.
밧줄을 잡고 물이 흘러내리는 암벽을 내려가 안부에서 봉우리를 힘겹게 올라서면 또 봉우리가 나오고 너덜길을 힘들게 넘어서니 비로서 귀떼기청봉의 커다란 산괴가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전에 큰귀떼기골로 내려갔었던 갈림길을 지나고 바람부는 너덜지대를 지나 귀떼기청봉(1580.5m)에 오르면 검은 구름이 서서이 하늘을 덮어 공룡능선과 용아장성을 가리고 기다려야 할 신광훈님은 보이지도 않는다.


홀로 정상주 한잔에 김밥을 먹고 한동안 이어지는 너덜지대를 지나 단체산행객들과 함께 한계령갈림길을 넘어서니 등로는 진흙탕길이라 오르는 사람들 모두 바지가 지저분하다.
사람들을 추월해가며 끝청에 오르고 간간이 나타나는 단풍들을 구경하며 중청대피소로 내려가면 수많은 등산객들로 벅적거리고있어 신광훈님이 잠자고 있었다는 대피소 안은 미처 들를 생각도 못한다.
조금씩 뿌려대는 부슬비를 맞으며 대청봉(1708m)에 올라 새빨간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멋진 설악을 한번 바라보고, 희운각대피소로 내려가 컵라면을 사 먹고 용변도 보고 식수를 보충해서 길을 떠나려니 빗줄기가 굵어지고 산에는 운무가 잔뜩 몰려오기 시작한다.


신광훈님이 없나 대피소 안을 확인하고 공룡능선으로 들어가 밧줄을 잡고 신선봉으로 올라가면 반대에서 오는 많은 산객들이 힘든 얼굴로 희운각까지 얼마나 남았나 연신 물어본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천화대를 넘고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1275봉 전의 암벽을 넘어 미끄러운 암릉길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운무에 덮힌 능선을 넘는다.
마가목이 열려있는 너덜지대를 지나 마등령으로 내려가니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운무가 점점 짙어져 미시령까지 야간산행을 할 것인지 갈등에 빠진다.
고민끝에 웬지 새벽에 계곡에서 미끄러졌던 일이 생각나고 몇번 가보기는 했지만 비에 젖은 황철봉 너덜지대도 걱정이 되어 늦게라도 서울버스를 탈 수있는 속초와 가까운 비선대로 내려가기로 한다.


운무로 꽉 차 한치 앞도 보이지않는 미끄러운 등로를 조심스레 따라가면 너덜지대들을 넘고 봉우리들을 사면으로 우회하며 길이 이어진다.
그칠줄 모르고 퍼붓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홀로 구슬피 우는 짐승을 안개사이로 바라보다 철계단을 내려가니 급하게 이어지는 흐릿한 돌길이 기다린다.
언제나 지겹고도 힘들게 느껴지는, 금강굴로 이어지는 바윗길을 이리저리 미끄러지며 내려가면 우렁찬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곧 어둠속에 비선대 철다리가 나타난다.
굵은 물줄기를 토해내는 천불동계곡을 건너 안개가 심하고 비가 많이 와도 미시령까지 갔어야했다는 자괴감에 빠져서 찰흑처럼 어두운 탐방로를 바쁜 걸음으로 내려간다.